2006. 4. 2. 08:46ㆍIssue/History
독도의 내력은 일찍부터 기록에 오르내린 울릉도와 관련지어 살펴보아야 한다. 본토 유민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울릉도의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된 것은 6세기 초 (512) 후였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512)년에 "6월에 우산국이 신라에 속했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울릉도라는 명칭이 정착됨에 따라 그 부속 도서인 독도로 우산이라는 명칭이 이동하게 되었다. 조선 1432년 (세종 14)에 편찬된 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에서도 "우산, 무릉 두 섬이 (울진)현 정동(正東)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동해 상에 무릉과 우산의 두 섬이 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1531년 (중종 26)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 울릉도 가 현의 정동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잇고 있다.
1694년 삼척청사 장한상이 울릉도의 300여리 근처에 울릉도의 3분의 1 크기의 섬을 발견한 기록을 담은 <장한상 울릉도사적기>를 펴냈다. 이것은 한국 문헌에 나오는 울릉과 우산(독도) 의 지명은 모두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일본의 주장에 대해 울릉도와 그 부근에 있던 독도를 우리가 17세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생히 입증하는 것이다. 18세기 에 나온 정상익의 <동국지도>에 이르러서는 울릉도와 우산도의 위치와 크기가 정확하게 표시되었으며, 조선 후기의 지도첩에는 으레 울릉도 옆에 우산도 또는 자산도를 표기하고 있다. 일본 스스로도 독도를 한국 땅이라고 인정한 자료가 줄을 잇는다.
독도는 512년 울릉도와 함께 신라에 귀복되었으며, 고려에서는 행정 구역에 편입시키고 백성을 옮아 살게 하는 등 울릉도와 독도 경영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었다. 조선시대에는 독도를 '우산도', '삼봉도', '가산도', '가지도'등으로 불렀다. 조선은 한때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모든 섬에 공도정책을 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가 잦아지자,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 받고 일본 어부의 어로 활동을 금지토록 하였다.1667년 일본인이 편찬한 <은주시현합기>, 1869년 일본 외무성 고관들이 편찬한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1876년 일본 내무성에서 만든 <태정宮> 결정서, 1876년 일본 해군성이 작성한 <朝鮮東海 岸圖>, 1905년 동경박물관에서 펴낸 <일본전쟁실기>, 1936년 일본육군참모본부에서 나온 <지도구역일람도> 등의 자료 등에서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밝혔다. 기인 1899년(광무 3년)에 당시 중등과정 신식교육기관에서 활용됐던 <대한지지> 제 1권에 삽입 돼 있는 지도 대한전도에는 울릉도 옆에 '于山'이라는 표기와 함께 섬이 그려져 있으며 좌 측 상단에는 '光武 3년 12월 15일 學部 편집국 刊'이라는 표시가 선명히 적혀져 있다.
강원도 울진현에 속해 있던 독도를 1900년 고종황제의 칙령 41조에 의해 독도를 울릉군의 한 부속도서로서 공식적으로 강원도에 편입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이 독도를 1905년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5년 앞선 것으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사실을 뒤엎을 수 있는 귀중한 발견으로 평가된다.'독도'라는 이름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경상북도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국시대 ~
1)
512년 6월 (신라 22대 지증왕 13년)지금의 울릉도를 본도(本島)로 하고 독도로 인정되는 우산도(于山島)를 작은 섬으로 하는 우산국(于山國)이 라는 하나의 독립국(獨立國)이 있었다.
2)
신라 22대 지증왕은 아슬라주(阿瑟羅州) 군주(君主)로 이찬 벼슬에 있던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정복케 하였다.
3)
이사부는 나무로 만든 목우사자(木偶獅子)라는 무기를 써서 우산국을 정복한 뒤 6월에신라에 귀속시켰다.
4)
그 뒤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다.
고려시대 ~
1)
930년 (고려 태조 13년) 고려 태조13년 우릉도(지금의 울릉도)에서 사절로 백길,토두 두사람을 보내어 조정에 공물을 바쳤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 백길에게는 정위, 토두에게는 정조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 때가 고려 태조 왕건이 길창(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을 무찌른 해이다.
2)
1018년 (고려8대 현종 9년) (우산국이) 동여진의 침략을 받아 항복하였으나 곧 조정에서 이완구를 시켜 피난민을 우산국으로 돌려보내고 농기구와 이물품을 전달
3)
1022년 (고려8대 현종 13년) 동여진의 침입으로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을 예주에 살도록 했다.
4)
1132년 (고려 17대 인종 10년) 울릉도 독도에서 → 조정에 공물을 바침
5)
1132년 (고려 17대 인종 10년) 우산국대신 → 우릉(于陵 또는 羽陵)이란 이름으로 바뀌고 우산국주(宇山國國)대 신 우릉성주로(于陵城主)로 바뀜. 이는 우릉도와 우산도(독도)로 구성된 우산국이 완전히 중앙정부의 직할아래 들어갔음을 의미함.
6)
1141년(고려 17대 인종 19년) 강원도인 명주도 감창사(溟州道 嵌倉使) 이양실이 울릉도에 사람을 보내 본토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과실과 나뭇잎을 채취하여 조정에 바쳤다.
7)
1157년 (고려 의종 11년) 명주도 전중내급사 김유림 파견 → 섬의 중앙 꼭대기 (지금의 성인봉)에서 동으로 1만여보, 서로 1만3천여보, 남으로 1만 5천여보, 북쪽으로 8천여보에 달하고, 마을 7군데 등 보고.
8)
1197년 (고려 명종 27년) 동쪽지역으로 이주시켜 농사짓게 했으나 풍파가 심하여 다시 서쪽으로 이주.
9)
1242년 (고려 고종 29년) 실력자 최이에 의하여→울릉도 이민 사업 실시 → 풍랑등으로 시민사업 실패거듭
조선시대 ~
1)
1416년 (태종 16년)울릉도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비워두는 - 공도 정책 발표
2)
1417년 (태종 17년) 삼척사람 김인우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임명 → 울릉도 파견 → 15호 86가주민이 있음을 발견 → 3명만 안무사에게 설득되어 육지로 옮김→여기서 우릉도를 공도정책으로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한 이유중에 주목할 점은 "강원도에서 무릉도까지 풍랑 속의 머나먼 뱃길로 수장될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 무릉도에 와서 사람이 살게 된데 는 고려말 나라의 부패와 정권의 불안정으로 가혹한 세금과 부역을 피하여 이 곳으로 왔기 때문이란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1425년 (세종 7년) 태종 뒤를 이은 세종도 공도정책계승 → 김인우를 역시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파견. 여기서 "우산무릉등처"란 섬이 우산도와 무릉도등 2개가 있다는 표현이 분명함.
4)
1438년 (세종 20년) ① 울진 사람의 남회와 조민을 무릉도순찰경차관으로 파견 ② 남녀 66명을 수색하여 본토 송환 → 본국 모배죄 ③ 주모자 김안 → 교수형, 나머지는 노복으로 삼음.
5)
1441 (세종 23년) 만호 남호에게 울릉도 수색지시 → 70여명 송환 , 공도정책 계속 이후 → 울릉도 독도에는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았던지 육지와 몇년동안 소식이 두절됨 → 그 후 새 섬이 있다는 설이 나돔.
6)
요도/신도설 그리하여 공도가 된 후 사람들이 항해 중 울릉도(무릉도), 독도(우산도)를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 생긴 섬이란 신도설, 요도설이 떠돌았다. 조정에서 신도/요도를 확인하려 했다. 그 확인 기록이 바로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려있다고 보면 된다.
7)
세종실록 지리지 강원도 울진 현조에 → 우산과 무릉의 두섬이 울진현 바다 한가운데 있는데 두섬의 거리가 멀지 않아 맑은 날에는 바라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8)
삼봉도 세종 뒤를 이은 성종 때도 해안주민들 사이에 강원도 경내에 속하는 동해 한 가운데에 삼봉도가 있다. 부역이나 세금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어갔다.
9)
삼봉도 수색 조정에서 파견된 강차관 박종원이 삼봉도에 다녀왔다는 김환경과 함께 삼봉도 수색했으나 실패 → 삼봉도는 독도이다.
10)
성종실록 김자주의 삼봉도(독도) 묘사 기록 - 25일에 섬서쪽 7∼8리 남짓한 거리에 정박하고 바라보니 섬북쪽에 세바위가 나란히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이 있고 다음은 암석이 나란히 섰으며 다음은 중도이고 중도 서쪽에도 작은 섬이 있는데 그 모두가 바닷물과 통한다. 바다와 섬사이는 인형 같은 것이 별도로 30여개가 서있는데 의심나고 두려워 그 섬에 접할 수가 없어 도형을 그려 돌아왔다.
11)
1531년 (중종 26년)「신증동국여지승람」의 45권 울진현군에 → 우산도와 울릉도 두 섬은 울진현 정동에 있다. (우산도) 세봉우리가 하늘로 곧게 솟았으며 남쪽봉우리가 약간 낮다. 날씨가 맑으면(울릉도에서) 세봉우리가 위의 나무와 산밑의 모래톱이 역력히 보이고 바람이 잦아지면 이틀에 도착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독도에 관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은「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입증하는 확고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무척 중요하다. → 신라 지증왕 13년이래 → 세종실록 지리지 → 고려사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까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일관되게 나타내고 있음은 독도가 우리영토임을 분명히 한 것이 틀림없음.
12)
1693년 (숙종 19년) ① 대마도주가 동래부로 서계 보내옴 → 조선 어민의 죽도 출어금지 요청 ② 조정에서 →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회신 ③ 영의정 남구만 → 형세조사차 삼척첨사를 울릉도에 파견
13)
1693년 (숙종 19년) 안용복, 박어둔 등 40여명의 조선어부는 울릉도, 독도에서 조업중인 일본 어선 발견 → 추방을 위한 격투 (독도 사수 - 안용복 장군편 참조)
① 일본의 도쿠카와 막부는 대마도주로 하여금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불법월경을 스스로 금지시키겠다는 서계를 보내었다. ② 일본 도쿠카와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를 두고 "두섬은 조선의 영토"라는 서계를 휘하의 관백과 태수에게 쓰게 했을 만큼 독도의 조선 영유권 존중. ③ 조정은 울릉도 수토제도를 채택하고 3년에 한번씩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에 관원을 보내 순검케하여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주권은 변함없이 행사함.
14)
1697년 2월 (숙종25년)「신증동국여지승람권 45여지고 일본 막부 → 독도는 조선영토임을 공식인정
15)
1699년 (숙종 25년) 안용복 장군은 일본 에도 막부(정부)로부터 울릉도.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하는 증서를 받음
16)
1900년 10월 25일 (고종 37년) 칙령 제 4호 울릉도는 울도로 개칭하고, 강원도는 울진현에 속해있던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묶어서 하나의 독립군으로 설치하면서 군청관할 구역을 울릉전도와 죽도 및 석도라고 못박았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섬목앞의 실제 죽도이고, 석도는 → 석 즉 돌 → 독도를 의미한다. <독도의 독은 홀로 (독)이라고 하고 돌 (독)이라고도 한다.>
17)
1904년 8월 23일 (고종 41년) 조일 의정서에 의거 → 독도에 → 일본 해군 부대 설치
18)
1905년 5월 17일 (고종 49년) 일본 정부 → 독도를 죽도라 변칭하고 시네마현 토지대장에 기재하고 일방적으로 일본 영토에 합병 선언
19)
1905년 11월 17일 (고종 49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조선국권 상실
지도속의 독도의 역사
1)
1462년 (세조 8년)
「동국지도」와 「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그리고 「동람도」에는 울릉도와 우산도가 별개의 섬으로 그려져 조선영토에 포함되어 있음.(이들 지도는 우산도가 울릉도 서쪽에 그려져 있다. 뒤에 제작된 동국지도에서 우산도가 울릉도의 동쪽에 위치하도록 수정되었으며 울릉도와 독도사이의 거리까지 정확하게 나타나 있음.
2)
1530년 (중종 25년)
중종 25년에 완성된 「신증 동국 여지승람」에 실려있는 팔도총도 → 독도가 그려져 있다.
3)
1785년 (정조 9년)
하야시의 「삼국통람도설」을 번역한 클라프로트의 삼국통도에 나라별로 채색이 다른 표시에 독도는 한국 영토로 동일 색으로 채색됨.
4)
1822년 (순조 22년)
해좌전도 → 우산도가 울릉도 동쪽에 표기
5)
1842년 (현종 8년)
김대건 제작 「조선전도」에 우산도가 울릉도 동쪽에 표기
6)
1873년 (고종 10년)
일본에서 제작된 「조선국세견 전도」에 울릉도와 독도를 강원도에 같은색으로 채색되었음
외국에서 본 독도 - 리 앙쿠르
1)
1787년 5월 (정조) - 프랑스 - 라 페레즈 대령(la perouse) - 다 즐레(울릉도) - 독도(부솔:Boussole)
2)
1797년 - 영국 - 브로오트(Broughton) - 울릉도(아르고노트:Argonaute) - 그 뒤 유럽서 - 울릉도를 다즐레와 아르고노트 2가지로 기재
3)
1840년 - 독일 - 지볼트(Siebold) - 일본지도를 만들면서 - 울릉도를 아르고노트 섬 - 독도를 다즐레 섬에 맞춰서 기재. 그 뒤 - 유럽지도 -아르고노트 섬은 없어지고 다즐레 섬만 남았다.
4)
1849년 (현종15년) - 프랑스 - 고래잡이 베인 리 앙쿠르(Li ancourt)호가 독도를 발견 - 리 앙쿠르 록스(Li ancourt Rocks)라 명명 (Rocks는 바위의 복수 단어임) - 섬이라기보다는 2개의 바위 덩어리로 봄.
5)
1854년 (철종 5년) - 러시아 - 푸차친(Putiatin) 해군 중장이 이끄는 군함 팔라다호(Pallada)가 독도를 발견하고 - 마블라이 앤드 올리부차록스(Manalai & Olivntsa Rocks)라 명명.
6)
1855년 - 영국 - 중국파견함대 소속 - 호넷(Honet)함의 해군 중령 - 라르시스(Charlses c. Farsyth)의 지휘 아래 - 독도 측정 관찰 - 호넷롯스라고 명명(러시아와 영국도 독도를 열암으로 보았음)
7)
서양지도에서는 - 독도를 "리 앙쿠를"라고 해양지도에 기재되었음.
8)
일본은 - 1900년 이전까지는 - 독도를 "리 앙코르도 로코스" 또는 "리앙 고르도 열암"이라고 불렀다.증거 1 - 1867년 만든 - "대일본국 연해 약도" 와 1870년 만든 "대일본 사신 도전"이라는 지도에 -' 리 앙코르도 로크스" 또는 "리앙 고르도 열암"이라고 불렀다. 증거 2 - 1880년 (고종 17년, 명치 13년) - 독도와 울릉도를 조사한 일본군함 - 야마키는 - 울릉도를 마츠시마 - 독도를 마츠시마에 좀 떨어지게 표시하고 "리앙고르도"라고 보고한 기록이 있음.
9)
오늘날 독도를 리 앙쿠르(Li ancourt)라고 표시하는 나라가 있음 - 한일간의 분쟁지역으로 - 인정하는 셈. -- 한일 독도 분쟁에 끼어 들고 싶지 않다는 계산임
정치 사회적
일본은 하시모토 류타로(교본룡태랑)정권 출범이후 「팽창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있으며, 과거의 침략정책·전쟁도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다. 일제의1905년 독도침탈 시도는 국제법상 정당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이는 일제의 1905년 11월 대한제국 외교권침탈이나 1910년한국 전체의 침탈도(당시의 국제법상) 정당한 행위였음을 암묵적으로 전제한 주장이다.
일본정부 각료와 자민당 요인들이 끊임없이 망언을 되풀이하고,「독도 영유 실현」을 선거공약화 할뿐 아니라 독도영유권의 「평화적 실현」을 97년도 외교지침의 하나로 설정한 것 등은 오늘날 일본정부가 한국에 대해 1905년 구 제국주의 외교를 계승, 신 제국주의 외교정책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왜 한국정부는 울릉도와 똑같은 한국의 고유영토인 독도수호를 위해 강경 대응책을 채택하지 못하는가? 어느 외교관이 말하기를, 『일본 정부의 그러한 공약과 지침은 일본 국내 무마용이라 하니 너무 과민하게 대응하지 말고, 침묵하는 것이 일본을 자극하지 않는 좋은 방법』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한심한 대응방법이다.남의 나라 영토에 대하여 「일본영유권」을 「평화적으로」실현하겠다고 공약하고 올해 외교지침에 넣은 것이 일본 국내용이고,한국에 대한 대외정책이 아니란 말인가?
지난 1월 벳푸(별부) 한·일 정상회담에서 일본총리는 독도영유권 주장을 거론하지 않기로 양국 외무부간에 사전 합의돼 있었다. 그런데도 하시모토 총리는 독도영유권을 거론하였다. 그리고 자민당의 일부가 배후에서 지원하는 우익단체의 차량 10여대가 정상 회담장을 둘러싸고 독도(일본의 표기는 죽도) 탈환」을 외치며 시위를 자행하였다. 한국의 일부 외교관들은 대오 각성하여 일본에 대한 장밋빛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현재까지 양국이 발굴한 자료에 의하면 독도는 100% 한국영토이다. 일본의 관심있는 학자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한국은 독도와 정신대처럼 주권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 특히 일본의 팽창주의정책에 대응해서 심각한 무역 불균형을 교정하고,저질문화 침투를 방지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 독립 한국의 위상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독도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입장이 섰다면 그에 부응하는 정부의 확고한 대응이 필요하다. 일본은 지금으로서는 이 문제를 쟁점화하기에는 불리한 여건임을 알고 있다. 그런 까닭에 최소한의 영토주장을 계속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일본의 주장을 보편화, 관례화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다 때가 오면 언제든지 독도문제를 현안화시키면서 노골적으로 편입(점령)을 가시화할 것이다.
특히, 국제 사회의 변혁기가 오고, 주변국이나 다른 강대국이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시기라고 판단되면 독도는 자국의 영토이며, 인근해역도 자국의 해역임을 주장해온 그간의 입장을 일본 정부의 공식 의견화합과 함께, 이전의 수동적인 자세에서 전환하여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행동에 나설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는 구체적인 조치에 착수하여 독도와 인근 해역에 걸쳐 해상자위대의 작전지역내로 편입 확정하고 한국해군의 통과나 주둔을 실력으로 저지할 것이다.
곧이어, 군사력과 힘을 바탕으로 군대 주둔을 시도하여 일방적인 점령을 감행하거나,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함으로서 영토편입을 관철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지역 어민과 극우단체 등을 동원하여 독도 편입을 유리하게 여론화하는 노력을 강화할 것 또한 분명하다. 행정조치를 취해 일본의 조업구역으로 결정하고 해상자위대의 보호아래 한국어선의 조업활동을 막으면서 일본어선이 제멋대로 조업활동을 본격화해 버릴 것이 틀림없다.
추가적으로 일본의 입장에서 이 지역에 대한 부수적인 조치와 개발계획을 구체화하여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이다. 또한, 한국 정부의 항의나 한국민의 열띤 반응은 의도적으로 무관심한 자세로 일관하여 아예 무시해 버릴 것도 분명하다.
오히려 정당한 일이었음을 주장하고 준비가 덜 되거나 대응능력이 약화되어 있는(적어도 현재로는 이러한 실정이다) 한국 정부에 오히려 항의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물러설 수는 없다. 조상이 물려주고 후손이 살아가야 할 터전을 잃을 수는 없다. 더 개척하지는 못할 망정 잃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그러한 논리와 근거, 주변환경부터 뿌리뽑아 버려야 한다. 우리 땅을 우리 손으로 가꾸어야 하겠다.
경제적
(1) 유엔 해양법 채택
1970년 12월 유엔총회는 각 연안국의 관할권범위 밖에 존재하는 심해저 자원은 인류공동유산이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1973년에 조직과 절차를 결정한 후, 1982년 4월에 본문 320개 조항과 9개 부속서로 구성된 유엔해양법 협약을 채택하게 된다.
이 유엔해양법 협약은 영해 및 접속 수역, 국제 해협, 군도국가(群島國家), 배타적 경제 수역, 대륙붕, 공해, 섬, 폐쇄해(閉鎖海), 내륙 국가, 국제 심해저, 해양 환경의 보호, 해양 과학 조사, 해양 기술의 발전 및 이전, 분쟁 해결 등을 내용으로 하며, 9개의 부속서를 포함하고 있다.유엔해양협약은 과거의 전통적인 해양체제와 비교할 때 무해통항(無害通航)을 비롯, 통과통항(通過通航), 군도수역(群島水域),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EEZ), 대륙붕범위, 심해저 규정 등 다음과 같이 6가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협약은 12해리 영해폭을 확정하고 영해 내에서 외국선반에 대한 무해동항(Innocent Passage) 제도를 인정하고 있다.
영해란 국제법에 정해진 조건에 따라 연안국이 영토관할권에 준하는 배타적 관할권을 행사하고 외국선박에 대해 무해통항권이 인정되는 수역이다.영해 내에서는 일반적으로 연안국이 경찰권과 관세권 등과 같은 영토관할권에 준하는 배타적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유엔해양법 협약 외국선박이 연안국의 평화 질서 안전을 저해하지 않는 한 이 수역을 통행할 수 있다는 무해통항제도를 인정하고 있다. 잠수함의 경우는 수면으로 부상하여 국기를 달고 지나가도록 규정하고 있다.
둘째, 협약은 국제항해에 이용되는 해협에 대한 새로운 개념으로서 통과통항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영해의 폭이 확장됨에 따라 해안거리가 24해리미만이 되는 국제해협에대한 항해의 자유가 크게 제한됨으로써 이들 해협에 대한 제 3국 선반의 통행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다. 통과통항은 영해에서 적용되는 무해통항제도보다 더 강력한 통행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따라서 해협을 접한 연안국은 어떠한 경우에도 통과통항을 중지시킬 수 없으며 영해상의 무행통항과 달리 항공기에도 통행권한이 부여된다. 잠수함도 잠수한 상태로 통과할 수 있다.
셋째, 협약은 군도수역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국가들의 군사적 안전과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등과 같이 해양 한가운데에 여러 섬으로 이루어진 국가의 경우 각 섬마다 영해를 포함한 관할권의 범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군도중 가장 밖으로 돌출한 섬들의 외측한계를 직선으로 연결, 이를 영해기준선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군도수역도 제한이 존재한다.
다른 나라의 선박들이 이 수역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도록 국제해협의 통과통항과 유사한 통과권을 부여하고 있으나 주권국가가 아닌 섬들에 대해서는 군도수역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 국가영토의 상당부분이 대륙에 접해있고 일부분만 군도로 구성된 국가에 대해서는 군도수역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넷째, 협약은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경제수역은 1945년 트루먼 선언 이후 일부 남미국가들이 인접해역의 어족자원을 독점하려는 목적에서 선포하기 시작한 것으로 연안국 해양관할권 확대주장의 상징으로 꼽힌다. 이 제도는 영해를 200해리까지 연장하려는 연안국과 이를 저지하려는 해양선진국들간의 타협책으로 채택된 것이다.
유엔해양법 협약은 영해기준선으로부터 200해리 이내에서 해저, 지하, 상부 수역의 자원개발 및 보존, 공해방지에 관련된 연안국의 배타적 권한을 인정하고 있다. 선박의 항해 및 그 상공의 비행에 대해서는 공해와 마찬가지로 제 3국의 자유가 보장된다.
다섯째, 협약은 대륙붕범위를 종전의 지질학적 개념에서 벗어나 보다 광범위하게 재정의하고 있다.
과거의 대륙붕은 지질학적 개념에 기초하여 수심200m까지의 지점 또는 이 한계를 넘어서더라도 그 수심이 해저자원개발을 가능케 하는 지점까지의 지역으로 제한했다. 그러나 협약은 대륙붕을 육지영토의 자연적 연장부분이라 할 수 있는 대륙변계(大陸邊界)의 외측까지 또는 대륙변계의 외측이 200해리까지 미치지 않는 경우에는 영해기준선으로부터 200해리까지의 거리에 있는 해저 및 지하로 정의했다.
여섯째, 협약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심해저 문제에 대한 규정이다.
협약은 연안국 관할권 밖의 심해저 및 광물자원에 대해 인류공동유산 개념을 적용했다. 이에 따라 심해저의 자원탐사 및 개발과 이용을 총괄할 국제심해저기구가 설립되게 됐다. 그러나 유엔해양법협약이 보편적인 지지를 확보한 가운데 발효되었다고 해서 모든 해양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유엔해양법협약은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왔던 주요한 해양문제에 대해 명확한 규정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특정유형의 분쟁을 강제관할의 대상으로부터 제외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어 협약발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갈등의 소지가 있다.
(2) EEZ (Exclusive Economic Zone) 이란 무엇인가?
항해 및 그 상공 비행에 관하여는 공해와 마찬가지로 제 3국의 자유가 인정되는 수역이다. 따라서 배타적 경제수역(EEZ)내에서는 수면으로부터 해저 하층토에 이르기까지 생물 및 무생물자원, 경제 개발 및 탐사, 인공섬 구조물 설치, 해양조사 관할, 해수해풍을 이용한 에너지생산, 해양환경보호 등에 대한 주권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EEZ를 선포할 수 있지만 인접국과의 거리가 400해리 미만일 경우 협상을 통해 획선(劃線)해야 한다. 일례로 한·일간은 최소 23.57 해리(대한해협)에서 최장 450해리, 한·일중간은 최장 350해리에 지나지 않아 경계선 획정을 위한 협상이 불가피하다.
전략적
과거 일본은 러시아에 대응하는 경제수역을 선포(1977년)할 때에도 한국, 중국과의 마찰이 예상되는 지역은 대상 수역에서 제외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1996년 2월 이후에 보여 준 일본의 강력한 망언은 일본 내부의 정치 상황과도 관련이 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동안 국제적인 여론을 의식하고 한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독도문제'에 대한 공세적인 발언을 자제해 온 일본 정부가 갑작스런 태도의 변화를 보인 것은 우일 성향이 강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정권의 출범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찍이 일본 전몰자 유족회 회장까지 지낸 바 있는 하시모토가 일본 총리에 선출되었을 때.
우리 나라에서는 앞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계가 껄끄러워지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우려가 '독도문제'를 계기로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일부러 일으키고 있는데 에는 크게 네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장기적인 전략에 바탕을 둔 외교적 대처법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 나라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한, 지금 당장은 독도를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틈나는 대로 문제를 제기해 놓음으로써 외교적인 기록을 남겨 두자는 속셈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도가 한·일간의 영유권 분쟁 지역이라는 인식을 국제사회에 확산시키고 나중에 언젠가 국제 정세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날이 오면 그 때에 본격적인 땅뺏기 싸움을 벌일 수도 있으리라는 계산이다.
둘째, 독도 문제를 센카쿠 제도(중국명 釣魚島 : 현재 일본이 점령 중)와 쿠릴열도 남단 도서(일본식으로는 북방 4개 섬 : 현재 러시아가 점령 중) 문제와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현재 센카쿠 제도를 놓고 중국·대만과 쿠릴열도 남단 도서를 놓고서는 러시아와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다. 따라서 독도 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보임으로써 다른 두 건의 분쟁 상대방에게 시위 효과를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한국과의 배타적 경제수역 경계 설정을 위한 협상을 할 때, 좀더 유리한 입장에 서기 위해 독도 문제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의 설정은 현재 세계적인 추세가 되어 가고 있으며, 멀지 않은 장래에 한국과 일본은 그 경계를 설정하기 위한 구체적인 '선긋기' 협상을 벌이게 될 것이다. 이 협상에서 일본은 '독도'를 하나의 협상 도구 내지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어떤 변수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는 분석이다.
넷째, 하시모토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국내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문제를 발생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하시모토 총리 자신이 일본 내 보수 우익 세력의 지도자 중 하나이고 일본 연립 여당의 권력 기반 역시 보수 우익 세력에 있다. 따라서 보수 우익을 표방하고 있는 현 정권에게 있어서 '영토 분쟁'은 어느 정도의 외교적인 부담이 따르더라도 상당한 국내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이슈(issue)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네 가지 가운데 셋째와 넷째는 1996년 2월 이후에 보여 준 일본 정부의 태도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고 판단한다.지난 1996년 6월 1일에 2002년 월드컵의 공동 개최가 결정되고 6월 23일에 제주도에서 두 나라 정상들이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해서 독도 문제에 대한 국민적 경계심을 일제히 늦추는 것은 너무 발빠르다는 느낌이 든다. 독도 문제에 대한 일본의 기본 전략은 결코 수정되지도 폐기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정부와 국민들이 독도 문제에 대한 감정적이고 일시적인 대응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전략에 따른 신중하고도 치밀한 대응을 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일본과 우리의 입장
(1) 일본의 입장
일본 정부가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 것은 1905년 1월28일. 그로부터 4주 뒤인 2월22일 시마네 현(縣)은 현(縣) 고시40호로 우리의 독도를 「다케시마 」죽도(竹島)로 명명, 오키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둔다고 공시했다. 그후 독도는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국무원 고시 제14호로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규정하는 해양 경계선은 한˙일 두 나라 사이의 평화가 유지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평화선(Peace Line)'을 규정하였고, 그 뒤 51∼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 협상과정에서 두 나라간의 외교문제로 논쟁대상이 되었으나 그 해결이 뒤로 미뤄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집권 자민당은 최근 선거공약과 정책지침에까지 공공연히 독도 영유권주장을 포함시키는 등 독도문제를 수면 하의 영토문제」에서 「수면 위의 영토분쟁」으로 부상시키고 있다. 일본이 독도 영토편입을 주장하는 근거는 첫번째로, 근세초기 이래 독도는 일본영토였고 영토편입 직전까지 오랫동안 일본이 「실효적 경영」을 했으며 두 번째로, 영토편입 당시 독도는 주인 없는 돌 섬이었으므로 「무주물선점(無主物先占)」을 한 것이라는 두 가지 논리로 집약될 수 있다.
또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마무리하기 위해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대일평화조약(Treaty of Peace with Japan)」에 실려있는 제2조 (a)항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그리고 울릉도를 포함하는 "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right), 권원(title)과 청구권(claim)을 포기한다."의 세 섬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우리 나라와 일본은 큰 의견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 나라는 이 세 섬의 한국의 영토에 포함되는 중요한 섬의 예로서 언급된 것이며, 따라서 울릉도에 딸린 섬인 독도는 당연히 한국의 영토에 포함된다고 보고 있다. 반면에 일본은 이 세 섬은 한국 영토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외곽선을 표시하는 섬들이며, 따라서 독도는 한국 영토에서 제외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외무성 관료 출신의 관변학자 가와카미 겐조(川上 健三)를 중심으로 다수파를 이루고 있는「고유영토=실효. 메이지(明治)시대에 와서도 오키 도민(島民)들은 울릉도로 가는 길에 죽도(竹島)에서 전복 등 해산물채취에 종사했다. 1898년께 부터는 오로지 강치(물개 비슷한 바다동물)잡이에 전념하게 됐다.
그러자 「강치적 경영론」은 1966년 가와카미가 펴낸 「다케시마(竹島)의 역사지리학적 연구」에 매우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저자가 외무성조사관이었을 때 쓴 이 책은 일본측이 독도영유권을 정당화하는데 인용되는 가장 유력한 문건이다. 독도의 실효적 경영에 관한 가와카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죽도(竹島)의 개발·경영에 관해서는 1618년에 오타니(大谷)·무라카와(村川) 양인이 막부정부로부터 울릉도로 가는 도항권을 얻어 이 섬의 개발에 종사했고 울릉도를 오가는 길에 지금의 竹島에 들러 어획을 했다.
이에 관한 고문서는 많다. 또한 이 섬의 경영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1696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확한 지도」도 있다. 강치잡이에 나서는 사람이 급속히 늘어나 강치가 절멸위기에 처하게 됐기 때문에 1904년 9월 나카이(中井 養三郞)가 독도의 영토편입·임대를 요청하게 됐다』 「국사대사전(國史大辭典)」제9권「죽도(竹島)」항; 길천홍문관(吉川弘文館) 1988년간) 이는 그 자신이 집필한 독도연구서의 핵심적 내용을 일반인이 알기 쉽게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일본은 울릉도가 조선조의「공도정책(空島政策)」으로 4백50년 동안 무인화해 있는 사이에 오타니(大谷)등이 울릉도를 「발견」, 그곳에서 벌목에 종사하면서 독도에서 어로활동을 한 것을 중시한다. 가와카미와 같은 「실효적 경영론자」들은 수 백년 동안 비어있던 울릉도로 본토의 한국인들이 직접 나가서 개발에 손을 댄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따라서 더 멀리 떨어진 독도로 나가는 일은 더더욱 어려웠다는 주장이다.
이상이 일본측 독도영유권주장의 주요핵심이다. 이를 철저하게 논박하고 제압하기 위해서는 현재 확보하고 있는 우리측의 자료와 사료를 한층 더 보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영토문제는 가장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그것이 일본측에서 제기될 때 감정폭발이 먼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감정을 진정시키면서 일본을 침묵케 하는 길을 찾는 것은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해 한국인이 발휘해야할 지혜다.
(2) 우리의 입장
정부는 독도문제에 관해 「무대응」이 최선책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현재 우리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만큼 일본측의 「시비」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측 입장의 근거는 아래와 같다.
·지정학적 근거
우리 영토인 울릉도에서 독도까지의 거리는 48리인데, 일본 은기도에서는 이 거리의 약 2배인 82리이다. 따라서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우리 나라에 포함되어야 한다
·역사적 근거
1. 독도는 신라시대에 울릉도와 더불어 우산국을 형성하였으며, 우산국은 신라 지증왕 13년 (512년) 신라에 귀순하여 왔다. 그 이후 계속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도 우리 나라의 관리하에 있다.
2. 일본이 1905년 도근현시 40호 행정조치를 취한 것은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가 아님을 실증하는 것이다.
·국제법상 근거
1. 그 지역이 주인이 없어야 한다.
2. 영역취득의 국가의사가 있고, 그 의사를 대외적으로 공표 하여야 한다.
3. 그 지역의 실효적인 점유가 있어야 한다
·카이로 선언
포츠담선언 '카이로선언'을 보면 폭력과 강요에 의해 취득한 모든 영토를 돌려준다는 구절이 있으며,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통해 카이로선언을 전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을 선언하였으므로, 폭력과 강요에 의해 빼앗겼던 독도를 일본은 당연히 포기해야 한다.
당시 일본의 폭력성을 증명하는 대표적 예가 '고종강제퇴위'사건이다. 일본은 1905년 그들의 강요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다. 이에 대항하여 고종황제가 국가의 자주권회복을 위해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한자 일본은 이를 빌미로 궁궐밖에 대포를 배치한 채 고종황제를 위협하여 강제 퇴위시켰다
·국제 사회 상황에 따른 우리의 입장
독도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정부의 입장은 확고하다. 그러나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올 경우 우리도 같이 영유권을 주장하며 맞대응 하면 국제적으로 독도가 분쟁 수역이라는 인식을 심으려고 하는 일본측의 의도에 말려드는 꼴이 된다. 따라서 소리나지 않게 독도에 대한 실질적 점유를 강화함으로써 일본이 제풀에 지쳐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 정부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독도에 접안시설 공사를 벌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다.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탈환」하기 위해 당분간 실력행사에 나설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이는 한·일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만들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커다란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문제제기는 훗날을 기약하기 위한 「기록용」인 셈이다. 그러나 정부의 「무대응」 전략에도 한계는 있다. 94년 발효된 유엔해양법협약에 따라 전세계가 바다의 경계선을 긋기 위한 작업(EEZ)에 들어갔고 한·일양국도 그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배타적 경제수역(EEZ : Exlusive Economic Zone)은 그 수역의 주인이 되는 연안국이 그 수역 안에서 돈벌이가 될 만한 모든 경제적인 활동을 배타적(독점적)으로 할 수 있는 수역을 가리킨다. 이 수역은 영해와 공해의 중간에 자리잡는 '제3의 수역' 이다. 이 수역의 성격은 경제 활동 면에서는 영해와 같고, 선박이나 비행기의 통과와 국제 통신 등에 있어서는 공해와 같다.
이 수역의 주인이 되는 연안국이 배타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는 대강 다음과 같다.
◎생물, 비생물 자원의 탐사와 개발 및 보존과 관리
◎수력, 조력, 풍력 발전을 비롯한 경제적 탐사와 개발
◎인공섬 시설 및 구조물을 설치 운영 하는 권리
◎해양 환경의 보호 보존에 대한 관할권
◎해양에 대한 과학적 조사권
이상과 같은 특성 때문에 이 수역을 '자원 영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수역에서 다른 나라들의 모든 권리가 박탈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들은 이 수역에서 선박 항해 및 비행기상공 비행의 자유와 해저 전선 파이프라인 부설 등의 자유를 지닌다.
앞으로의 협상추이에 따라서는 독도문제가 국제해양법재판소등의 심판대상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면 정부가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일본과의 영유권 다툼은 피할 수 없게 된다.정부는 이런 상황이 오더라도일본측의 논리를 제압할 수 있는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는 각종 역사적 자료와 지도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유사분쟁사례
(1) 팔마스 섬(The Island of Palmas)사건
사건은 미국과 네델란드 사이의 필리핀 군도에 있는 팔마스 섬의 영유권에 관한 분쟁으로서, 1925년에 상설 중재 법원에 부탁되어 1928년에 네델란드의 승소로 종결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06년 1월 21일 당시 미국의 통치하에 있던 필리핀 군도의 모로(Moro) 주지사인 우드(Leonard Wood) 장군이 관내 순시 도중 팔마스 섬에 네델란드 국기가 게양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 사실을 미국 정부에 보고하여 일어나게 된다.
당시 미국은 필리핀 군도는 미국, 스페인 전쟁의 결과 1898년 12월 10일의 강화조약에 의하여 스페인으로부터 미국에 할양되었으며 팔마스 섬은 이 조약에서 표시한 필리핀 군도의 경계선 내 약 20해리 지점에 위치하였으므로 당연히 이 섬도 미국에 할양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두 나라간의 분쟁이 시작되고, 약 20년간 외교적인 논쟁이 계속되다가 중재 재판에 부탁되어, 이에 대하여 이 재판의 단독 판사인 후버는 이 섬이 네델란드의 영토임을 판결한다.
(2) 클리퍼튼 섬(The Isaland of Clipperton)사건
이 사건은 프랑스와 멕시코 사이의 클리퍼튼 섬의 영유권에 관한 분쟁이다. 1858년 11월 17일 프랑스 정부의 고등 판무관인 해군 장교 켈붸강(Victor Le Coat de Kerweguen)이 항해 중에 클리퍼튼 섬을 발견하고 아무런 프랑스 주권의 표식도 남기지 않은 채 그 섬을 떠나게되었다.
이 사실이 하와이 정부에 통고되고, 1858년 12월 8일자 호놀룰루의 신문 폴리네시안(The Polynesian)지에 영문으로 클리퍼튼 섬에 대하여 프랑스의 주권이 이미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게재하였다.그후 약 40년 동안 이 섬에 대해 아무런 분쟁이 없다가1897년 11월 24일에 프랑스는 이 섬에서 새똥을 수집하고 있는 사람 3명이 미국기를 올리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이들에게 어떠한 허가도 내준 적이 없고, 또 이 섬에 대하여 미국으로서는 주권을 주장할 의도도 없다는해명을 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1897년 12월 13일에 멕시코가 클리퍼튼 섬에 군함을 파견하여 멕시코 국기를 게양하였다. 이로 인해 멕시코와 프랑스 사이에 이 섬의 영유권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1909년 3월2일에 이 사건을 엠마누엘 3세(Emmanuel III)의 중재 재판에 부탁하였고 1931년 1월 28일에 프랑스의 승소로 종결되었다
(3) 동부 그린랜드(The Eastern Greenland) 사건
이 사건은 동부 그린랜드의 한 지방의 영유권에 관한 덴마크와 노르웨이간의 분쟁으로 덴마크의 청구에 의하여 상설 국제 사법법원에 제소되어 1933년 4월 5일에 덴마크의 승소 판결로 종결되었다.
1931년 7월 10일에 노르웨이는 이 지역이 임자 없는 땅이라고 하여 선점을 선언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덴마크는 그린랜드 섬 전체에 대하여 이미 장기간에 걸쳐 주권을 주장하고 또 행사함으로써 주권에 관한 유효한 권원을 취득하였으므로 노르웨이의 선점 선언은 현존 국제법에 위반되는 것으로서 불법이고 무효라고 주장하였다.법원은 이 사건의 판결에서 이 분쟁에 있어서의 결정적 기일은 노르웨이가 선점을 선언한 1931년 7월 10일이므로, 그 시점에서 덴마트가 노르웨이의 선점을 무효로 할 만한 주권을 이 지역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느냐 하는 점이라고 하면서 덴마크의 주권을 인정하였다.
(4) 망끼에 및 에크레오(The Minquiers and Ecrehos) 사건
이 사건은 망끼에 및 에크레오의 도서 및 암초에 대한 영국, 프랑스간의 영유권 분쟁으로 1950년 12월 29일의 부탁합의에 의하여 1951년 12월 5일에 국제 사법법원에 소송이 제기 되었으며, 1953년 11월 17일에 영국이 승소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 있어서 양국은 이 섬에 대해 11세기부터 원시적 권원을 취득하여 그후 계속적으로 이를 유지하여 왔으며 결코 이를 상실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영국은 이 섬에 대한 원시적 권원의 취득이 1066년의 노르만디공에 의한 영국 정복에 있다고 주장하였다.또한 영국은 이 섬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해협 내 여러 섬을 관할하고 있는 저지(Jersey)섬의 법원이 1826년부터 1921년까지 수 차례에 걸쳐 형사재판 권을 행사하였다는 사실, 1820년경에는 저지 섬의 주민이 이 섬의 가옥에 건립한 가옥에 대해 과세를 물었다는 사실, 1875년의 영국 국고 지불 명령서에 서 지정한 해협 내 여러 섬의 항국에 이 섬이 포함되었다는 사실등을 주장하며 이 섬에 의한 실효적 점유에 의한 권원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 프랑스는 노르만디공이 프랑스 왕의 가신이었으며, 해협 내 여러 섬은 933년 이래 프랑스 왕의 봉토로서 관리되었으며, 1202년에 영국 왕 John은 프랑스 법원의 판결에 의해 노르만디 전체를 포함하는 프랑스 왕의 봉토로서 그가 보유하고 있는 전 토지를 몰수당하였다는 점을 들어 섬에 대 한 고유의 권원을 주장하고 있으며, 또한 이 섬의 수로측량, 1861년이래 75년 동안의 조명과 부표의 관리, 1838년의 수상과 공군상의 시찰 등을 바탕으로 실효적 점유에 의한 권한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쌍방의 주장에 대하여 법원에서는 쌍방의 주장을 모두 배척하고 1886년 및 1888년을 결정적 기일로 인정하여 망끼에 및 에크레오의 도서 및 암초에 대한 주권은 영국에 귀속되는 것으로 인정한다고 판시하였다.
(5) 타 유사분쟁 사례와 독도와의 비교
한·일 양국이 고대로부터 독도에 대하여 실효적 점유를 하면서 영유권을 행사하여 왔다는 다툼의 측면에서 보면 망끼에 및 에크레오섬 사건의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1905년의 시마네현 고시에 의하여 임자 없는 땅을 선점하였다는 다툼의 측면에서 보면 클리퍼튼섬 사건이나 동부그린랜드 사건의 형태가 될 것이다.
일본은 17세기에 이 섬을 발견한 이래 이 섬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실효적인 지배를 함으로써 원시적 권원을 취득하였다고 주장하는 한편 1905년에다시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당시의 국제법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시마네현 고시를 통하여 실효적 점유를 하게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망끼에 및 에크레오섬 사건과 클리퍼튼섬 및 동부 그린랜드 사건을 합친 복합된 형태인 양 논점을 흐리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논점은 결코 복합될 수 없는 것이다. 원시적인 권원이 취득되었다면 임자 없는 땅이 아니기 때문에 선점의 주장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이며(선점은 임자 없는 땅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임자 없는 땅 선점을 주장하고자 한다면 한국의 원시적 권원만을 부정하여야지 일본 자신들에게 원시적 권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일본이 원시적인 권원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1905년의 시마네현 고시를 실효적 점유를 강화하기 위한 국내적인 행정적 조치였다고 주장을 해야 하며, 임자 없는 땅 선점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원시적 권원 주장을 철회하고 한국에 원시적인 권원이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본이 이처럼 복합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원시적인 권원 측면에서나 임자 없는 땅 선점의 측면에서나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나오게 된 소산이라고 볼 수 있는 바 한국은 이러한 측면에서의 공격논리 개발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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