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중 하나만 건진 영화, 분홍신
2006. 7. 5. 15:52ㆍIssue/Movies
옛날, 기억이 나지않을만큼 아주 옛날에, 분홍구두를 신은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칠때까지 춤을 추다 마침내 발목이 잘리고 말았다는 바로 그 이야기. 그 이야기가 바로 공포가 되어 돌아왔다.
분홍신이라는 소재에 일제 강점기의 연정에 얽힌 이야기까지 꽤나 많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공포영화로서 나름대로 손색이 없는 듯하다. 우연히 주운 신발하나가 그렇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줄이야. 역시 지하철에서 주운 물건은 물품보관소로 라는 공익광고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니깐.
현재 이 영화는 여우주연상에 김혜수씨가 올라가 있는바, 작품보다는 배우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극중 선재는 세 가지 모습을 지닌 야누스적인 여성이다. 그 첫째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고, 깨끗하며 고고한 여성으로서의 선재. 남편을 위해 밥을 짓고, 이혼을 당했어도 위자료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바로 그런 선재이다.
두 번째 선재는 고고함과는 거리가 먼 탐욕스럽고, 흉폭하며, 인철의 말을 빌리자면 ‘발정난 암캐’같은 탐욕의 화신으로서의 선재이다. 그녀는 딸아이가 있음에도 천연덕스럽게 애인을 가정에 초대하며, 딸아이를 발로 차면서까지 자신의 물건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
그리고 마지막, 게이코로서의 선재. 그녀가 선재인지 게이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선재의 마음, 어느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존재임은 분명하다. 그녀는 원한에 모든 것을 걸만큼 포악하며 제어되지 않는 존재이다.
극중 혜수씨는 이 세 가지 모습의 선재를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첫 번째 선재의 모습에 가려 남은 두 번째, 세 번째의 모습이 희미하다고나 할까. 영화가 끝나고 남는 선재의 모습이란, 그저 무서움에 질려 비명만을 질러대는 순진한 첫 번째의 선재, 그 모습만 남아있다. 다른 선재의 모습은 어디로 간 걸까.
두 번째 선재가 잘 보이는 씬은 인철과의 사랑부분, 고작 며칠 만에 식사초대를 받고, 충동적으로 그의 집에가 사랑을 나눌 만큼 그녀는 탐욕적이고 색정에 가득차있다. 그렇다면 몇 컷 안 되는 부분이지만, 사랑을 나눌 때 여성상위로 좀 더 도발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어떠할까. 적어도 다른 누구도 아닌 인철의 앞에선 좀 더 매혹적이고 뇌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어필이 잘 되었을 듯한데,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든다.
세 번째 선재는 여러 부분에서 조금씩 살짝살짝 드러나지만, 본격적으로 그 모습이 보이는 때는 후반 선재가 딸아이에게 아빠가 왔다는 부분을 거짓말이라고 추궁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자기 것을 빼앗아 가는 이에게 추호도 용서가 없는 광기에 찬 그녀, 그녀라면 딸아이의 목이 부러질 정도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주저 없이 때리고 파괴했을 터인데, 극중 세 번째 그녀의 모습은 너무 약해 보인다. 광기에 가득찬 버서커와 같이, 좀 더 원독에 가득찬 모습을 원했는데, 오히려 후반부엔 약한 그녀의 모습에 지루해졌다.
사실 이렇게 영화가 후반부에 무너진 이유에는 시나리오상의 탓도 크다. 링이나 착신아리같이 원혼에 얽힌 법칙을 찾아내고 그 이유를 해결하는 노력하는 모습보다는 그저 히스테리에 가득찬 소리만 꽥꽥 지르다, 할머니의 말 한마디에 상황종료라니. 후반 게이코와 옥희의 반전이 한 부분 나타나지만, 이미 대세를 역전하기엔 좀 역부족이 아닌가 싶다. 무언가 노력한 부분이 있어야, 그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의 극한 감정을 깨닭게 되는데, 아쉬운 부분이 많은 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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