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논쟁] 독도 명칭 비교

2006. 4. 2. 08:36Issue/History

[1] 한국측의 독도(獨島) 호칭

① 신라(新羅)의 于山國 정복(征服)이 있은 때(512년)로 부터 울릉도와 그 부속 도서가 존재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식된 것 같으나 호칭은 다소 모호한 상태로 혼용되었다.

울릉도- 于山國, 芋陵, 鬱陵, 羽陵城, 武陵島, 茂陵島

독도- 于山, 芋山, 于山島,

② 조선왕조(朝鮮王朝) 태종(太宗) 초기(쇄환 정책을 시작한 때; 1410년 경)에 이르러 쇄환정책의 실시과정에서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독도의 존재는 점차로 확실히 인식되었다.

울릉도- 武陵, 茂陵, 鬱陵島

독도- 于山, 于山島, 芋山島, 三峰島, 可支島, 石島

③ 조선왕조(朝鮮王朝), 고종(高宗) 18년(1881년)에 울릉도와 및 그 부속도서에 대한 쇄환정책(刷還政策)이 종료되었으며 이듬해(1882년) 한국 정부는 을릉도에 도장(島長)을 임명 파견하고 고종(高宗)37년(1900년)에 행정구역 조정을 단행 울릉도(鬱陵島)를 울도(鬱島)로 개칭,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며 이 울도군(鬱島郡)이 부속도서인 죽도(竹島)와 석도(石島)를 행정 관할토록하였다.즉 한국의 행정구역상, 울릉도-鬱島 ; 독도-石島, (돌섬, 독섬 -전라도 방언- 의 意譯)로 정착된 것이다.

④ 일본은 1905년 1월 28일 그 내각 결의로 리앙꾸르시마(Liancourt Rocks)를 죽도(竹島)로 명명하고 이를 島根縣에 편입조치키로 작정하였다. 이 편입조치는 동 2월 22일 島根縣 告示 제40호로 공시(公示)되었으나 한국정부 등에 통고된바는 없었으며 1906년 3월 28일에 鬱島 郡守 沈興澤이가 일본 시찰단의 통고로 이를 알게되어 이를 상부에 긴급히 보고하는 공문서에서 독도를 "獨島"로 표기하였다.이는 돌섬, 독섬 (전라도 방언)을 한자(漢字)로 작성된 공문서에서 음역(音譯)한 것이다.

⑤ 이후, 한국은 일관되게, 울릉도-鬱陵島 ; 독도-獨島 로 표기하고 있다


[2] 일본측의 독도(獨島) 호칭

① 한국측의 쇄환정책(刷還政策)으로 울릉도와 독도가 공도(空島) 상태에 있었던 조선왕조(朝鮮王朝) 초기 이래 일본의 하급(下級)무사(武士)와 어민(漁民)들이 울릉도와 독도에 왕래하여 어로(漁撈)와 기항(寄港)의 흔적을 남겼으나 공식적인 기록은 없었다. 다만, 1667년에 발간된 문헌([隱州視聽合記])에서, 처음으로 울릉도-竹島, 磯竹島 ; 독도-松島 라는 호칭이 나타난다.

독도에 대한 일본측의 지리적 인식이 한국측의 그것에 비하여 월등히 완벽하고 확실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정교한 고문헌의 고증을 통해 펴고 있는 가와가미 겐조(川上健三)는 그의 저서에서 이 부분의 논증을 위해 그 전반(前半)을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는 바, 그 책에서도, "우리나라(일본)에서는 오래도록 竹島 또는 磯竹島라고 칭해진 것은 울릉도이고, 오늘의 竹島(우리의 독도)는 그 당시에는 松島라는 이름으로 불리워 졌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러 가지 문헌의 기록을 종합적으로 참고컨대, 적어도 1618년부터 명치(明治) 초기까지 이러한 -즉, 울릉도:竹島, 독도:松島 라는- 호칭은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 같다. 그러나 이 호칭의 사용도 결코 일관된 것은 아니었다.

② 일본의 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이 불완전하고 모호한 것으로 계속되어 왔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는 명백한 이유는 울릉도와 독도의 이름(일본측으로서는, 竹島와 松島)을 서로 교차적으로 혼동하여 사용해 왔다는 점이다.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일본측으로서는 "竹島"라고 불리우던 을릉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은 1618년 이래, 검증될 수 있을 정도로 형성되어 있었지만 "松島"로 호칭되었다고 하는 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은 극히 모호한 것에 불과했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서 조그만 암도(岩島)가 동남(東南) 쪽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이를 일관되게 于山, 于山島, 芋山島, 등으로 부르고 있던 한국정부나 민간의 호칭 관행과 현격하게 비교되는 것이다.

③ 적어도 독도(獨島)와 같은 절해(絶海)의 적은 섬에 대한 일본측 호칭의 "일관된" 관행이 존재했었는가 하는 점은, 정교하고 치밀하게 집필된 가와가미 겐조(川上健三)의 책에서도 충분한 설명이나 입증의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울릉도를 松島로 호칭한 사실이 기록된 것은 武藤平學이 [松島開拓之議]를 일본 외무성에 제출한 1876년이다.

이 武藤平學의 "松島" 開拓願 사건 이래로 일본에서는 울릉도를 "松島"로 호칭하고, 독도를 "리앙꾸르 島"로 호칭하는 관행이 있었다고 보인다.

④ 일본측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일본측으로서도 처음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혼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에도(江戶)幕府이래, 明治 초기까지 어느 정도 일관되게 울릉도를 竹島로, 독도를 松島로 호칭하던 관행이 깨어지게 된 것은 유럽 항해자(航海者)들의 임의적인 명명(命名)에 기초한 서구(西歐)제작 해도(海圖)에 영향을 받은 명칭의 혼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상 19세기에 와서, 이른 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추세를 따라 많은 서구(西歐)의 항해가들과 탐험가들이 한반도 근해를 항해하면서 을릉도와 독도를 그들이 최초로 발견하였다고 착각하고 임의로 명명(命名)한 사실(史實)이 있다.

나. 유럽 항해자(航海者)들의 "임의적인 명명(命名)"


☞ 1787년 프랑스 항해자 P?rouse의 울릉도 발견과 Dagelet 명명(命名)

프랑스의 이름있는 항해가(航海家), Jean Fran?ois Galaup de la P?rouse는 두척의 범선(Boussole호 및 Astrolabe호)을 이끌고 1787년 동남아와 한국 연안을 탐사 항행하였다. 그는 동년 5월 27일 동해(東海)에서 자기들 지도에 없는 섬 즉 울릉도를 발견하고 이 섬을 최초로 발견한 Boussole호에 승조한 육군사관학교 교수 Lepaute Dagelet의 이름을 따서 Dagelet라고 명명(命名)하였다.

☞ 1789년 탐험가 Colnett의 울릉도 발견과 Argonaut 명명(命名)

영국의 탐험가 James Colnett는 1789년 Argonaut호를 이끌고 대한해협을 거쳐 동해(東海)로 진입하였다. 그는 계속 北西進하다가 울릉도를 발견하고 자기 배의 이름을 따서 Argonaut로 명명(命名)하였다. 1797년 화태(樺太) 서해안으로부터 한국의 동해안을 탐사한 영국 해군 중령 William Robert Broughton이 울릉도를 Argonaut로 명명(命名)한 것으로 기재하고 있는 Philipp Franz von Siebold의 기록(1840)이나, 秋岡武次郞의 記述은 모두 誤謬임이 확인되었다.

☞ 1849년 프랑스 포경선(捕鯨船) Liancourt號가 독도를 발견(發見; ?)하고 이를 Liancourt Rocks로 명명(命名)하였다.

다. 울릉도와 독도 명칭의 혼동에 관한 일본측의 변명


유럽 항해자(航海者)들의 임의적인 명명(命名)에 기초하여 서구(西歐)에서 제작된 해도(海圖)에 영향을 받아서 일본측에 독도와 울릉도에 관한 명칭의 혼란이 야기되었다고 하는 일본측의 설명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즉 1787년 프랑스 항해가 Perouse가 울릉도를 Dagelete로 명명하였는데 1797년에 영국사람 William Robert Broughton이 다시 이섬에 Argonaute라는 이름을 붙쳤다. 그러나 Broughton이 섬의 경위도(經緯度)를 잘못 측정하여 서구(西歐)의 지도에는 Dagelete와 Argonaute의 두 개의 섬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840년 Philipp Franz von Siebold란 자가 일본지도를 작성하였는데, 그는 울릉도(당시 일본이름으로 Takeshima즉 竹島)를 Argonaute로, 독도(당시 일본이름으로 Matsu- shima 즉 松島)를 Dagelete로 기재하였다. 그후 Broughton의 오류가 널리 알려져서 西歐의 지도에는 Argonaute란 섬이 없는 것으로 되고 결국 Dagelete만이 남았고 따라서 Matsushima 즉 松島라는 이름이 울릉도의 이름이 된 것이라고 한다.

이 일본측의 정교하지만 오류에 가득찬 변명은 주로 秋岡武次郞의 "日本海 西南の 松島と 竹島",[社會地理] 第27號, (1948년 8월)에 기초한 것으로서 잘못된 전거(典據)에 기초한 오류였음이 밝혀졌다. 즉, 앞서 지적한 것처럼 Argonaute를 명명(命名)한 자는 Broughton이 아니고 James Colnett 였으며 경위도(經緯度) 측정을 잘못한 것도 그였다. 이것을 독일 의사이며 아마추어 지도작성가 였던 Siebold가 지도를 만들면서 친절하게도 Broughton의 이름을 잘못 주기(註記)한 것이, 구차한 변명 그 자체 속에 까지 오류를 범하게 하였던 것이다.

맹목적으로 잘못된 서구(西歐)의 전거(典據)를 추종하여 한동안 죽도(竹島)라고 부르던 울릉도를 송도(松島)로 부르게 된 것도 울릉도 자체에 대한 일본인들의 모호한 지리적 인식을 입증하는 것이며 더구나 이에 부수하여 송도(松島)라고 부르던 독도를 이제부터 죽도(竹島)로 부르자고 결정한 1905년 일본 각의(閣議)의 논의가 얼마나 인위적(人爲的)인 것이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결국 종합적으로 보면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독도는 물론이고 울릉도에 대해서 조차도 확고한 지리적 인식이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