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위에게... ‘무도 편히 보기위해 정권 바꾸겠다.’

2011. 9. 19. 07:42Issue/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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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에 대한 방통위의 징계심사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번 돌+아이 사건에 이어 두 번째이다. 방통위는 ‘대갈리니’등의 자막표현, 하나가 과도한 고성을 지르는 모습, 정재형의 손으로 목을 긋는 동작과 개리의 상표 노출, 그리고 소지섭의 엉덩이를 때리는 장면 등에 대한 징계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방통위의 징계심사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다. 지난 6년간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온 장면에 대한 징계는 80년대 똘이장군처럼 무도를 길들이기 위한 처사로 의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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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예능에 새 지평을 연 무한도전은 내용뿐만 아니라 방송기법에 대해서도 다양한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 올해 서른세 살의 하하가 상꼬맹이 역을 자처하는 것도 그 성과 중에 하나이다. 하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8,90년대를 주름잡았던 ‘자니윤 쇼’(1989), ‘이홍렬 쇼’(1996)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토크쇼는 1인 게스트 체계를 유지하였는데, 등장 게스트의 폭로성 발언으로 인한 저질성 논란, 등장 게스트의 호불호에 따른 시청률 하락 등 지속적인 재미 보장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 문제는 집단 게스트 체계와 역할분담 시스템을 도입한 '놀러와'에 와서야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

무도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다. 리얼 버라이어티에 집단 게스트와 캐릭별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이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놀러와’가 출연 게스트간에 우호적인 관계가 엮어져 있다면, 무도는 적자생존의 대립적인 관계로 엮어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전은 성공하였다.

무도에서 하하는 고성을 지르며 자신을 과대평가하기 좋아하고, 1인자인 유재석을 찬양하면서도 언제든 그를 배신할 수 있는 좌충우돌 꼬마 캐릭터를 연출한다. 초반의 어색한 아이돌 게스트에서 무도의 빠질 수 없는 메인 캐릭터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포지션닝 체계를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고성이 없는 하하는 더 이상 무도의 하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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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의 트위터 / 예능 속 연출은 이제 필수적인 시대가 되었다.]


조롱은 예능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연출 중에 하나이다. 방송은 때로 스스로를 조잡하고 불량한 존재로 연출함으로서 기존의 사회적 가치들을 조롱한다. 소지섭의 엉덩이 차는 장면은 행동적인 면에서 이주일, 심형래 시대의 슬랩스틱 코미디와 유사하지만 그가 차는 것은 대스타에 대한 권위이다. 정재형의 손으로 목을 긋는 모습은 작곡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스스로 무너트림으로서 시청자들에게 편안함과 웃음을 선사한다.

웃기지 않으면 예능이 아니고, 예능의 웃음은 탈권위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실 위 장면은 무도에서 매우 낮은 레벨의 조롱에 불과하다. 광우병을 비꼬며 미친소가 자막에 등장하고, 재개발 지역의 텅 빈 아파트를 촬영장소로 선택한 김태호 PD의 결단에 비하면 말이다. 만약 위 장면이 정말로 경고 대상이라면 정말 이 정권하에 무도가 사라지는 모습을 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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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무도에서 보인 문제의 장면들은 연출의 트렌드와 예능 프로의 특성을 생각해 볼 때, 결코 무모한 수준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통위는 왜 무리수를 두는 것일까. 이는 방통위 위원장인 박만의 친정부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박만 위원장은 종편 방송에 대해 두 가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종편의 영향력은 지상파와 거의 비슷하다.’
‘종편, 지상파보다 제재수위 낮아야’
- 9월 8일 기자간담회

박만 위원장은 간담회에서 이를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밝혔지만, 그의 성향이 방통위 전체에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생각이다. 따라서 그의 발언과 무도에 대한 징계심사는 PD와 연출자들을 종편 방송으로 넣기 위한 하나의 포석으로 의심된다.

'무도 편히 보기위해 정권 바꾸겠다.'

최근 무도 관련 뉴스에 달린 한 네티즌의 댓글이다. 나는 이 말이 허풍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서 먼 용산참사나 4대강 사업에 대해서는 쉽게 눈을 감을지 몰라도,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작은 불편에 대해서는 절대 참을성을 발휘하지 않는다. 무도가 잘못된다면 제 2의 촛불집회가 시작될 수도 있다.

무도에서 보인 권위에 대한 도전은 기실 신문만평을 비롯하여 역사적으로 오래된 연출기법에 불과하다. 그리고 정의로운 정부는 항상 이러한 도전에 관대한 포용력을 발휘하였으며, 독재정권은 이를 탄압함으로서 스스로를 무너트리는데 일조했다. 선택은 이명박 정부와 박만 방통위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 선택에 대한 책임 또한 져야한다는 사실은 그들은 일찍 깨달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