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회고록] 15년전의 기억, 블루시걸을 회고하며...
2009. 4. 28. 13:29ㆍAnimation/Ani-Review
15년전 블루시걸...
1994년 겨울, 극장가에는 이른 아침부터 젊은 남성들의 담배연기 속에 익숙지 않은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어딘가 초초해 보였으며, 구겨진 전단지에 얼핏 비친 ‘Blue '라는 단어가 그들의 방문 목적을 짐작하게 해 주고 있었다. 이윽고 영화 상영을 알리는 네온사인 등이 켜지고, 사람들은 약간의 헛기침과 함께 빠르게 극장 안으로 사라져 갔다. 그 날은 한국 최초의 성인 애니메이션 ’블루 시걸‘의 상영일 이었다.
얼마전 블루시걸을 다시금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15년전에는 '국내 최초의 성인 애니메이션'이란 타이틀로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지만, 근래에는 '마케팅만 뛰어나고 정작 볼 것은 없었던 졸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무판권 DVD만이 근근히 돌아다니는 비운의 작품이 되어버린 블루시걸. 작품을 구하기는 의외로 쉬었지만, 작품을 보는 일은 무척이나 곤욕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블루시걸, 누가 이 작품을 졸작으로 만들어 놓았을까요? 개봉한 지 15년이 지난 지금, 영화를 다시 감상하며, 작품을 회고해 봅니다.
블루시걸과 당대의 작품들.
블루시걸을 보며 한숨이 나오는 이유는, 야한 것만 보여주면 잘 팔릴 것이라고 생각한 제작진의 안이한 의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당시 개봉 전후의 작품들을 보면, 그 전 해 스필버그 감독이 '쥬라기 공원(1993)'을 개봉하여 '컴퓨터 그래픽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었고, 디즈니의 라이온킹(1994)은 내용은 다소 유치하여도 어린이와 어른 모두 즐길수 있는 작품은 무엇인지 그 기준을 보여주었습니다.
반면 블루시걸은 작화, 연출, 스토리면에서 모두 수준 이하의 성적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우리는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라고 자랑하는 듯한 CG씬은 스토리와는 별 상관없는 장면에 등장하여 이질감을 주었고, 작화 수준도 당시 작품들과 견주어 볼 때, 형편없었습니다.
작화 수준이 떨어진 이유는 스태프 명단에서 찾을수 있었는데, 명단을 보니 원화맨 수가 동화맨보다 2배 가까이 많더군요.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하는 동화맨의 수가 원화맨보다 2배에서 3배 가까이 많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특이한 점으로 볼 수 있는데, 정확한 배경은 잘 모르지만 동화맨 - 원화맨 - 감독으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계급구조 안에서 원화맨으로 이름을 올려 후에 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으려는 직원들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찌되었든 원화와 원화를 이어주는 동화맨이 부족하다보니, 작화 붕괴는 필연적이었고 작품의 수준은 한층 더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역대 최고의 인기스타를 기용했다던 광고 카피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실제 들어본 주인공들의 목소리는 마치 국어책을 읽는 초등학생처럼 딱딱하게만 들렸습니다. 제대로된 성우 수업 없이 인기스타를 고용하여 마케팅을 펼치는 당시의 시스템은 이후 천년여우 여우비로까지 이어지는데, 좋은 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역시 성우들의 지위 향상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확신이 듭니다. 참고로 여주인공 채린 역을 맡은 김혜수의 목소리는 작품 중반부터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교체되는데, 아마도 후반 애로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마지막으로 음향 부분은 개인적으로 가장 안 좋게 본 부분이었습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가 그리 긴 편은 아니지만, 로버트 태권V에서 음향을 맡았던 김벌레씨의 레이저 빔 소리를 비롯하여, 적어도 음향 부분에 있어서는 그동안 떨어진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첫 전투씬에서 기관총이 발사되면서 '슈~팟~~' 거리는 레이저 빔 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작품에 대한 기대를 접었습니다. 너무 성의없이 만들었다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고나 할까요.
블루시걸, 추억으로만 기억되길...
결론적으로 작품은 중간중간 나오는 어설픈 섹스씬 외에는 별반 볼 것이 없는 괴작이 되었습니다. 어린아이도 지루할법한 작품에 다 자란 어른들이 공감을 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50만 흥행기록을 세우는 이변을 발휘하는데, 아마 당시에는 인터넷을 통해 영화평을 공유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광고에 혹한 관객들이 호기심 삼아 영화관을 찾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개봉이후 찍어내기로 한 OST가 관계자용 비매품으로 한 차례 나온 뒤, 실제 판매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 관객들의 반응이 어떠하였는지 대충 짐작이 가네요.
블루시걸을 보며, 사실 중간중간 졸았습니다. 스토리 자체가 엉성하다보니 아무리 야한 장면이 나와도 자연스럽게 졸게 되더군요. 그나마 관심있게 본 장면은 본편이 아니라, 마지막 영화 스태프들이 나오는 장면이었는데, 당시 애니메이션 제작 환경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네요. 오늘날 블루시걸이 재계봉된다면 어떤 평가를 받을까? 심형래씨의 '디 워'가 어느정도 성공을 거둔 것을 보면 꼭 실패한다고는 말할수 없지만 네티즌들의 엄격한 평가는 피해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블루시걸, 이제는 추억의 작품으로만 남겨두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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