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그렇게 무능한 국가였을까?

2006. 10. 2. 23:34Issue/History

이 글은 프로메테우스님의 '황실복원 장난하냐'에 대한 반박글입니다. 글을 읽기전에 먼저 원문을 읽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얼마전 황실복원에 대한 뉴스가 나가면서 이에 대한 여러 토론이 있었다. 찬성하는 쪽도 있고, 이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던지는 곳도 있었다. 찬성이든 반성이든 서로간의 차이를 알고 피드백을 나눌수있다는 점은 분명 좋은 일이다. 허나 이런 토론중에는 '황실복원'이라는 문제와 상관없이 조선왕조에 대해 맹목적인 부정만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이 글을 적는다. 과연 조선왕조는 멸망해야 마땅한 무능한 국가였을까?

조선왕조를 부정하는 이들은 먼저 일본제국에 의해 나라가 침략되었기 때문에 조선왕조는 좋지못한 나라이다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분명 일본제국에 의해 35년간 나라가 침탈당한 것은 분노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는 수많은 나라가 생겨났고, 또 멸망해갔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고구려도 결국 신라와 당나라에 의해 무너졌고, 위로는 발해에서부터 아래는 탐라국까지 수많은 나라가 멸망과 탄생을 반복한 끝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들 나라중 대다수는 바로 타국의 침략에 의한 멸망이었다. 그럼 이 나라들도 비난해야 하는가?

조선왕조의 멸망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 안밖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흐림없는 냉정한 눈으로 살펴보아야지 분노에 찬 시선만으로 역사를 이야기해보았자 소모적인 논쟁만 이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조선이 멸망 이전까지 어떠한 노력을 하였는지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

조선의 근대화 노력에 대해.
고종이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명을 개명한뒤, 대한제국은 다양한 면에서 근대화된 제도를 도입, 근대화 국가로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근대화적 문물은 지엽적인 일부분에 그친 것이 아니라, 군사, 경제, 사회, 문화등 사회 전반야에 걸쳐 이루어진 대대적인 개혁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고종이 있었다.

고종은 평소 자신의 선대왕중 가장 훌륭한 분은 정조라고 칭하면서, 18세기 조선이 보여주었던 조선 중화주의를 계승하고자 노력하였다. 당시 아시아는 청나라를 중심으로하여, 베트남등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부터 저 멀리 티벳까지 중화주의를 통해 세계가 운용되고 있었다. 특히 조선은 청나라와의 지리적인 근접성으로 인해 '동이'라고 불릴만큼 중국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존의 중화주의 사상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근대화 노력을 기울인 것은 놀라운 일이다.

비록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임오군란으로 인해 왕권붕괴로 인해 개혁이 완성되지는 못하였지만 이전까지 고종은 수많은 근대화적인 업적을 이루었고, 특히 청일전쟁이 종료된 1896년을 기점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둔다.

위 사진은 1900년대, 1910년대, 1920년대의 종로를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보면 신작로가 들어서고, 전신주가 생기는등 근대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사진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1898년 전철이 개통되는등 수도 한양은 아시아에서 근대화된 몇 안되는 선진도시중 하나였다.(일본은 한국보다 3개월 늦게 전철이 도입되었다.)


사진을 하나 더 보도록 하자. 위 사진은 경부철도주식회사가 제작발행한 1903년 경성지도이다. 녹색은 궁궐, 붉은 색은 신설도로 그리고 파랑은 확장도로를 의미한다. 이 지도를 보면 미국이 백악관과 의회를 중심으로 방사선 도로를 건설한 것과 같이 경운궁을 중심으로 이미 도로체계가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차의 경우, 경성철도정거장과 연결되어 서울에서 전국으로 이동이 가능하도록 이미 대한제국 시대에 철도망의 기간이 완성되었다.

이밖에도 전신기(1885), 전화(1893), 기차(1899)등 당시 서양에서도 최신의 현대화된 문물이 잇달아 대한제국에 유입된다. 이러한 것들은 단순히 몇몇개라고 치부될만큼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전반의 시스템을 개혁하는 개방의 물결이었다. 특히 서양식 화폐제도 도입을 위한 전환국과 만국우편협정에 가입하여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개설된 우정국은 빠트릴수 없는 부분이다.

군사력 부분에 있어서는 1981년 일본의 조사시찰단 파견을 계기로, 무라다 소총 2만정이 구입되어 신식군대 창설에 사용되었으며 이듬해 1982년 5월에는 중국 상하이로부터 12마력짜리 발전기를 구입해 기기국(무기 제작소)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 비록 실패로 끊나기는 하였지만 군함등을 구매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객관적으로, 군사부분의 제외한 근대화의 척도를 본다면, 청보다는 앞서고 일본과는 조금 뒤쳐지거나 동급수준이라고 본다.  

광무개혁에 대해.
광무개혁에 대한 글을 보니까, '집권층과 입헌군주제를 거부하고 개혁을 한답시며 왕권의 전제성을 더욱 강화한'이라는 표현이 있던데, 이는 광무개혁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데 따른 오해라고 본다.

광무개혁이전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여간 러시아의 보호를 받으면서 군주권을 회복시킨 사실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 이후 고종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한등급 상승시켜 대한 제국이라는 칭호로 광무개혁을 실시한다. 당시 조선은 영토가 작을뿐더러, 식민지를 가지고 있지 않기때문에 제국이라는 칭호는 가질수 없는 칭호였지만 고종은 제국이라는 칭호를 끝까지 고집한다.

그 이유는 직위당시 고종이 한 말에서 찾을수 있다. 당시 말을 요약해보면, '이것은 내가 황제로 높임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위의 일본이나 중국이 모두 황제국인데 우리만 군주국으로 남아 우리 국민이 중국이나 일본의 국민에 비해 한 등급 낮게 간주되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 모두가 중국이나 일본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는 계기를 만들어 재출발하자'라고 말한바 단순히 제국이라는 칭호를 전제주의의 상징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광무개혁은 단순히 구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공업 분야에 대한 개혁으로 이어져, 보부상들의 단체인 혜상공국을 창설하는가 하면, 신식 화폐제도와 중앙은행의 설립을 위한 기초 계획도 수립하게 된다. 이처럼 고종의 광무개혁은 단순히 전제주의의 옹호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 대항하여 조선을 근대화시키기 위한 광대한 개혁의 시발점이었다.

또 만민공동회 해산에 대한 이야기도 있던데, 황국협회와 독립협회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 따른 오해라고 본다. 분명 초창기 독립협회가 근대적인 시민단체로서 출발한 것은 사실이다. 초기에 황제가 근대화 사업을 주도하면 아래로는 독립협회가 민중을 계몽하여 사업을 이어나간다가 바로 초창기 독립협회의 성격이었다. 그런데 초창기 이러한 합작관계와는 달리, 독립협회와 황제사이의 관계는 대신 임명권을 두고 서로 갈라서게 된다.  그리하여 독립협회는 이 문제에 대해 성토하는 만민공동회를 열게 되었다.

이에 고종은 '민권이 중요한 것은 나도 알고있다. 허나 지금 민권을 우선시하다보면 국권이 약해지고, 국권이 사라지면 민권역시 찾을수 없다. 그러니 지금은 다소 불만이 있더라도 나를 중심으로 국권을 지키기위해 노력하자'는 뜻을 전하지만, 독립협회는 이러한 제안을 끝까지 거부하였고, 결국 고종이 황국협회를 통해 집회를 해산시키게 된다.

어느쪽이 옳은지는 영원히 미지수이다. 그러나 단순히 고종의 행동을 비난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본다. 국가부흥의 위해 국민의 권리를 제한 하는 것. 분명 비난받을 일이지만, 고종이 이 권리를 전제주의 강화에 사사로이 이용하였다는 말은 틀린 말일뿐더러, 이 권력을 국가부흥에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 문제를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하다.

동학만이 살 길인가?
또 글을 보면 민중의 고통이 심해져서 동학이 일어났고, 동학의 당시 일어난 러시아나 프랑스 혁명과 비교하여 설명하신 부분이 있는데, 이 또한 동학의 성격을 잘못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 동학이 외척과 세도정치에 반대하기위한 봉기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서양의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애초에 동학의 목적은 왕정붕괴가 아니라, 기존 양반권들이 가지고 있는 유교사상을 일반 백성들도 누리게 해 달라는 요청에서 출발한다. 즉 유교윤리의 실행주체가 양반사대부뿐만 아니라 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성향은 당시 유행하였던 춘향전이나 심청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춘향전을 보면, 출신차로 인해 기생과 양반은 결혼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춘향이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고 결국 이몽룡과 결혼하게 된다. 이러한 설정은 서민도 유교윤리를 충실히 수행하면 사회적, 혹은 국가적으로 인정받을수 있다는 주장이며, 이것이 바로 동학의 논리이다. 따라서 동학이 성공한다 할지라도 왕정정치가 바뀔 가능성은 전혀 없을뿐더러, 오히려 동학이 성공하였다면 왕정정치가 더 오래 존속될 가능성이 있다.

결론적으로 조선이라는 국가는 국왕이 무능해서 망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유능한 성격으로 인해 미리 싹이 잘라졌다는 표현이 옳을듯하다. 실제 현존하는 데이터를 보아도, 국가재정이 풍부하고 단기간내에 근대화 국가로 급성장하고 있는 국가가 내부적으로 망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본다.

또 앞서 일본에 의해 침략당했으니 무능하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국가가 군사력의 향상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요즘이야 핵탄두같이 일발몰살의 무기가 등장하였지만 당시는 총과 대포의 시기였고, 일본이 이미 수차례의 전쟁을 통해 정예화된 것에 비해 조선은 이제 막 발걸음을 띈 상태였다. 시작이 늦었기때문에 불만을 가지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되지만, 이 문제를 따질려면 중화사상에 편입된 시기부터 논해야되고 어쩌면 하왕조나 은왕조시기까지 가야될지도 모르겠다. 역설적으로 일본이 근대시기에 승승장구할수 있었던것은 문화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변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상과 같이 해당글에 대한 오류에 대해 몇가지 반박문을 적어보았습니다. 더 적고 싶긴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적어야 겠군요. 다른 의견이 있으시다면 그에 대한 의견역시 트랙백으로 걸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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