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본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성..

2006. 8. 18. 21:14Issue/History

정말 오랜만의 역사관련 포스트이다. 이번 포스트에선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반박으로 자본의 입장에서 본 조선시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발단의 논란은 현이님이 소개해주신 안병직 교수에 대한 단편기사. 기사내용을 보면 일본이 있기에 근대화가 가능했고, 해방후에도 발전을 이룰수가 있었다고 한다. 즉 과장된 식민지수탈론을 버리고, 식민지근대화론을 다시금 재조명해야 된다는 주장이었는데, 그 주장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본  포스트에선 1900년대 조선의 자본경제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근대화를 위해선 도시계획, 철도등 다양한 근대시설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결국 돈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 돈의 흐름을 추적할 수 있다면 적어도 식민지 시대, 조선이 근대화되었는지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다고 본다. 참고로 글에 쓰인 내용은 서울대 이태진 교수의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라는 책을 근거로 삼았으니, 관심있는 분이라면 책을 통해 좀 더 자세한 자료를 얻기 바란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1. 고종시대의 화폐개혁
1883년 조선말기, 한양에 전환국[典?局]이 설치되면서 조선은 서양식 화폐제도 도입을 위한 첫 문을 열었다. 전환국은 중국의 돈인 청전에 대응하여 조선의 독자적인 화폐제도를 만들기 위해 고종이 세운 건물로서 당시 고종이 화폐제도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보여주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1930년 유자후의 조선화폐고라는 책에서도 고종은 화폐전문가로 기술된다.)

이후 1900년경 대한정부는 신식화폐로 백동화를 만들어 대한천일은행을 통해 유통하였다. 유통 초기에는 서울, 경기일대에 인플레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였지만, 빠르게 수습되었으며 이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지역으로 통화범위가 점차 확대되었다.

1899년 영국이 통화표준을 금본위로 바꾸면서, 대한제국의 화폐개혁도 탄력이 붙기 시작한다. 고종은 그 해 11월 신식 지폐제도 시행을 위한 차관 도입교섭을 위해 이용식을 하야시 공사에게 보내 일화 500만엔 도입을 교섭한다. 즉 내자 200만엔에 외자 500만엔으로 금과 은을 매입하여 지폐의 태환성을 보장하려는 계획인데, 일본정부는 만성적인 재정 부족으로 이를 거부하였다.

교섭이 별다른 성과없이 끝나자, 1901년 고종은 프랑스 운남성 신디게이트로부터 관세를 담보로 차관을 시도하고, 협상에는 성공하지만 일본이 영국을 통해 파기를 요청하면서 큰 난관을 맞이하게 되고, 결국 1902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차관 도입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당시 고종이 외무대신을 통해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한국 상인이 300만엔을 거두어 정부에 제공하려고 하였으니 일본이 이를 방해하기에 고발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결국 대한제국의 근대화된 중앙은행 설립은 1902년 중앙은행조례가 완성되며 사실상 모든 준비를 갖추었으나 일본의 지속적인 방해로 무산되고,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한 1907년 들어서야 설립되기 시작한다.

2. 일본의 조세약탈
1901년 러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은 재정적으로 무척 빈궁한 상태였다. 당시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한 무기 구입 비용으로 17억엔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필요했는데, 내체 6억엔에 외채 7억엔을 합쳐도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한 가지 계책을 내게되는데, 그것은 바로 대한제국의 통화를 위조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기록은 1904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백동화가 악화라는 이유로 제일은행권으로 대체한 사실을 들 수 있는데, 당시 대한제국은 즉각 반박성명을 내며, 조선에는 악화가 없으며 오히려 개항지쪽에서 위조 화폐가 나돈다고 반박한다. 동시에 대한제국은 미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수호통상을 맺은 국가가 이 문제에 대해 방관하고 있다는 내용의 항의성 편지를 보내기도 하는데, 만약 대한제국이 진실로 자국의 통화를 악화로 만들었다면 결코 당시 열강중에 하나인 미국에게 이러한 서한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일본은 강점한 대한제국의 재산을 자국으로 빼돌리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는데, 1974년 김대준 교수의 '이조말엽의 국가재정연구'라는 논문을 보면, 당시 일본의 약탈 현황을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 이 논문은 2000년 출간된 고종시대 국가재정연구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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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도표를 보면 근대적인 회계제도를 도입하여 수입,지출의 균형이 잘 맞추어졌던 재정 상태가 1904년의 기점으로 점차 감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감소된 내국세의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일본이 1904년 대한제국에 파견한 재정고문을 이유로 들 수 있는데, 재정고문을 통한 일본의 외화반출은 대한제국의 강력한 조세저항에도 불구하고 내국세를 급격하게 감소시켰으며, 아울러 전년도 수입의 이월분 또한 축소시켰다. 즉 대한제국의 예산과 잔고를 모두 일본이 가져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액수는 어느 정도 수준일까? 구체적인 액수는 확인할 수 없지만, 해방이후 1954년 외무부가 발표한 대일 '배상 요구 조서'에 따르면 1949년까지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남한에서만 받아야 할 배상액이 174억엔에 이르며, 실질적인 유출금액에 따른 배상액수는 약 310억엔에 이른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 금액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국내 총생산액(GDP)인 550억엔의 55%에 이르는 금액으로 북한을 비롯하여 그 외 확인되지 못한 금액까지 추산하면 국내 GDP 중 7~80% 정도를 일본에서 수탈해 갔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일본은 독립 이후에도 미 군정에 들어오지 않은 틈을 이용하여 자국에 최대한 많은 재산을 가져가고자 대규모로 화폐를 남발하는데, 이것이 바로 50년대 인플레의 주역이 된 일본의 전후 화폐남발 사건이다.

3. 일본의 전후 화폐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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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미군정기의 통화량과 조선은행의 정부에 대한 지불(支拂) 초과>

광복 이후 남한은 경제적으로 두 차례의 고비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일본의 조선은행권 남발사건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광복과 더불어 일본의 식민지 경제권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경제체제를 갖추었으나, 지난 35년간의 수탈로 인해 경제 기반이 상당히 취약한 상태였고 여기에 국토분단으로 인해 사실상 대부분의 생산활동이 정상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특히 광복 이후 미군정이 들어서기 이전까지의 공백기간(8·15 광복 직후 미군정이 실시되는 9월 9일 이전까지의 24일 동안)을 이용하여 일본은 당시 대한제국내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자산을 보존하기 위해 대규모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하는데, 그 액수는 일본인의 예금뢰취(預金雷取) 25억원, 일제청산자금(日帝淸算資金) 12억원 등 총 37억원으로 이는 광복전 은행권의 2배에 이르는 액수였다.

대규모 화폐 발행과 함께 일본은 대한제국의 금융기관에 막대한 부채를 안겨주고 떠났는데, 당시 기록을 보면 91억원의 일본인 회사 발행 사채와 일본인 기업체의 대출금 25억원이 모두 상환 불가 상태가 되었다. 1944년 대한제국의 국민 총생산액이 55억원인 사실을 볼 때, 이 액수가 얼마나 큰 액수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미회수 자금들은 인플레 현상으로 이어졌으며,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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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1945년 12월에서 48년 12월까지 약 3년간 통화량은 6배로 증가하였으며, 정부대상금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무려 36배에 이르게 되었다. 동시에 물가는 1947년을 100으로 기준하여, 서울 지역의 소도매 물가를 비교해보면 1951년에는 이 수치가 무려 555.8% 증가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당시 누적된 인플레이션 양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준 자료이다.

마치며..
이상과 같이 간략하게나마 대한제국 시대의 화폐제도와 일본이 대한제국의 자금을 어떤식으로 수탈해 갔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대한제국의 자금을 모조리 수탈해간 일본이 그 중 일부를 태평양 전쟁을 위해 다시 국내에 공급하면서 얻어진 소기의 성과를 과장한 것에 불과하며, 이러한 단어보다는 식민지 기회박탈론이라는 표현이 일제 강점기 시대를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한제국은 자금력 부분에 있어 일본보다 더 양호한 상태였으며, 만약 일본에 의해 강점되지 않았다면, 일본보다 더 빠르게 근대화를 이룩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