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 삶과 꿈을 선택한 자의 결말.

2006. 6. 23. 21:16Issue/Movies

- 어린 시절 나는 하늘을 날 수 있었다. -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에서

흔히 어린 시절은 순수한 꿈의 시대라고 한다. 총과 칼로 무장한 적국의 군인들이 닌자로 보일만큼, 자신만의 상상력속에 꿈을 펼치는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어린애에 여자아이로 자라나며 그 꿈을 잊어버리지만 몇몇 이들은 그 꿈을 평생에 걸쳐 미치도록 갈망한다.

우리는 그들을 '꿈을 향해 나아가는 자' 바로 '도전자'로 부른다.

박경원은 잡초같은 여성이다. 11살, 어린시절 난생 처음 본 비행기에 마음을 빼앗긴 뒤 그녀는 조종사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왔다. 어렸을땐 여자는 안되라고 꾸짖는 아버지의 매질속에 학업을 열중하였고, 커서는 조종학교에 다니기위해 택시기사 일을 해가며 밤낮으로 노력한다. 그녀는 한 번 결심하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길긴 생명력을 가진 잡초같은 여성이다.

동시에 그녀는 저 홀로 언덕위에서 독야청청하는 소나무처럼 고귀한 여성이다. 사랑도 우정도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지만, 그런 혼돈속에서도 결코 기품을 잃지않고 당당하게 나아가는 그런 강하고 고귀한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는 때론 이기적이기도 하다. 단지 비행만이 그녀의 인생에 있어 전부였기에 조국의 암울한 현실도, 한지혁의 애달픈 사랑도 그녀에겐 허망하게 들린다.


윤종찬 감독은 청연에서 고민하고 선택하는 소시민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흔히 우리는 일제침략기라는 시대적 상황때문에 모든 조선인은 독립운동에만 열중해야 하고, 오직 조국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며 그렇지 않은 자는 매국노라고 생각하기 쉽다.

분명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독립을 위해 투쟁한 분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죄를 지은자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중간에 선 자는. 그들은 죄를 받아야 하는가 상을 받아야 하는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점령당한 조센진이기 때문에 그녀는 차별받고 그녀의 꿈을 이룰수 없었다. 실력으로 인정받고자 했지만, 일본 여류비행사 기베에게 그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조종사라는 꿈은 이루었지만, 친일파라는 말을 같은 조선인에게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사랑, 지혁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조선적색단의 거룩한 독립운동에 의하여 그녀는 그와 영원히 헤어지고 만다.

이렇듯 그녀는 항상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그리고 하나의 선택을 택할때마다, 하나를 얻고 다른 하나를 잃는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마치 외줄위의 곡예사같은 상황, 윤종찬 감독은 그런 시민을 삶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박경원은 이러한 역활을 충실히 행하고 있다. 대회 우승후 기자와의 간담회에서 나의 조국, 조선이라는 말을 당당하게 꺼내놓는 독립투사의 모습을 보이는 반면, 비행을 위해 일본의 황국시민 홍보운동에 참여하는 친일적인 행동까지. 흑과 백을 끊임없이 오가며 갈등하고 방황하는 당시 시민들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 장진영은 박경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답하기 위해 상영전 장진영의 인터뷰 내용을 구해서 보게 되었다. 몇가지 질문이 오갔는데, 그녀 역시 강인함을 모티브로 연기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강함이 구체적으로 어떤 강함인지 영화가 완성된 다음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단지 감독님의 요청에 의해 행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주인공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하였다고는 보기가 힘든 것같다.

강함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소나무같이 부러질지언정 꼿꼿히 자신의 세우는 강함, 잡초처럼 짓밞히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강함, 수많은 강함이 세상에 존재하며 배우는 그 강함중에 하나를 골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녀는 아직 이 곳까지 도달하지 못한 것일까.

실제로 영화를 보다보면 이런 엊갈림이 종종 눈에 띄인다. 동료 강세기의 죽음앞에서도 울지 못했던 그녀, 지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쓰러지지 않고 당당했던 그녀가 정작 지혁의 면회장면에선 서럽게 우는 장면이라니..

게다가 지혁의 죽음이후, 기베와의 대화에서 '이 더러운 땅을 떠나고 싶어'라고 말한 장면은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말이 왜 어울리지 않을가에 대해 백여가지 이유가 떠올랐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삶에 괴로와 할지언정 당당했던 그녀가 그렇게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비행기에 올랐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단지 도피일뿐, 그녀가 말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가기 위한 비행이 아니니까. 그녀는 행복했기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스트롤바를 놓지 않았던 것이다.


- 장금 '신비'에서 정희로의 변신
이 영화에서 주목되는 또다른 것은 바로, 대장금에서 '신비'역을 맡았던 한지민이 이정희로 캐스팅 된 것이다. 과연 그녀의 변신은 성공할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나름대로 의외의 모습은 보여주었지만 왠지 매치가 안된다고나 할까..

잠시 정희의 삶을 돌이켜보자. 정희는 어린 시절 식모로 들어가 병든 주인의 수발을 들며 자라왔다. 거진 10여년의 식모살이끝에 마침내 수양딸의 자격을 얻게된 그녀는 마침내 비행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의 우상인 박경원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기쁨에 찬 생활도 잠시, 사랑했던 지혁을 경원에게 빼앗기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저격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그녀의 모든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거짓자백.

경원이 정희를 다시 만났을때, 그녀는 공장의 노동자가 되어 모든 꿈을 잃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정희는 소리친다.  '네가 비행에 성공한다 한들 나중에 누가 널 기억해 줄지 아느냐, 너를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낱낱이 너의 비행(非行)을 까발릴 것이다',라고.. 그녀는 이제 원망할 줄 안다.

정희라는 인물을 보았을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처녀에서 세상사 모든 것을 통달한 작부의 이미지까지 짦은 시간에 많은 이미지가 교차한다. 그러나 그 설정이 작위적이기에 공감이 가지 않는다.

정말 정희가 그런 선택을 하였을까. 고문이 무섭고, 비행할수 없다는 좌절이 무서워 거짓조서에 서명한 그녀가 지혁의  감금사실을 경원에게만 모두 돌린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과연 정희는 경원을 무조건 원망만 했을까. 아니 나는 그녀가 차라리 경원과 같이 슬퍼하길 원했다.

게다가 조연의 특성상 짦은 시간에 많은 인상을 남겨야함에도 불구하고 지민씨의 연기엔 아직 부족함이 보인다. 가령 세기가 비행사고로 죽었을때, 그녀라면 주저앉아서 통곡을 하지 않았을까. 한 사람의 마음에 들기위해 못마시는 술까지 억지로 마셨던 그녀가 한 사람의 죽음에 그저 서서 작은 눈물방울만 흘린다고는 왠지 생각하기가 싫다.

드라마라면 조연이라 해도 늘 꾸준히 나오니, 해당 인물에 대한 이미지를 시청자에게 어느정도 어필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 고작 1시간 30분안에, 조연이라면 기껏해야 10여분미만의 정말 짦은 시간안에 그녀의 모든 것을 어필해야 하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하나의 동작에 의미가 있고, 연관성이 있어야하는데, 아직 이러한 모습은 눈에 띄지않는다. 조금 실망.. 


친일논란으로 인해 영화의 순수성이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연은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무언가 한가지에 빠져 오직 그것만을 바라보는 삶. 결국 비극으로서 종결되었지만, 최후의 그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 삶.  그리고 그 속에 시대와 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선택을 청연은 잘 그려내고 있다.